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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인이란 사람의 생각/정치/사회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드는 짧지 않은 단상

 학교 행정 시스템에 대외활동을 등록하기위해 군 입대전까지 교육 봉사를 했던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 캠프에 들어갈 일이 생겼다. 봉사활동 확인서를 발급 받으려면 일단 들어가긴 해야 하니까(물론 그 동안 비밀번호가 하도 많이 바뀌어서 뭐였는지는 한참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이디 생각나니 순식간에 비밀번호 쳐지고 들어가지더라. 한 때 내 크롬에서 가장 많이 방문한 사이트는 배나사였으니 말 다했지 뭐.

 

 발급 신청을 누르고 개인 게시판에 가서 그동안 써 놨던 글들을 보니, 그 때 나누었던 추억들이 생각나더라.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들, 학생들과의 즐거운 추억들이 있어서 배나사를 즐겁게 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크게 열성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물론 시험기간에 꼬박꼬박 나오고, 애들 보충해주는 일들은 그냥 저냥 했지만, 남들과 다르게 프로젝트 팀에 소속되어 있었던 적이 없었고, 그냥 흐지부지 넘어갔던 기억만 난다. 그게 제일 아쉽더라. 프로젝트 팀했으면 아는 선생님들이 좀 더 많았을 텐데.

 

 오랜만에 들어가니 여러 지부가 생겼고, 몇몇 지부는 배나사 자격을 박탈 당하였더라. 글쎄, 구로와 고양은 생길 때부터 그렇게 큰 지원을 못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찌 되었던 내부 사정은 모르니 내가 논할 자격은 없지만, 교육장 대표를 교체하면 될 걸 굳이 거기 소속 교사분들까지 다 교사 자격을 박탈하는 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생각인지 모르겠다.

 

 배나사 활동을 하면서 내가 주로 가르쳤던 과학이라는 과목도 사라졌드라. 내가 나올때 쯤 영어 교육도 잘려나갔고, 이제는 과학까지 잘려나간 걸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수학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과학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교육의 질을 위해서 수학만 남긴다고 하지만, 사실 노력하면 영어, 과학 둘 다 살릴 기회는 있었다고 본다.

 

 영어는 처음 도입때부터 성과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교재도 자체제작이 어렵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어떻게 첫술에 배부르랴. 하지만 첫술에 배가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나사는 영어를 버렸다. 너무나 쉽게 버려진 영어를 보면서 과학에선 그 일이 안 벌어지겠지라고 생각한 내가 안일한 거였구나.

 

 10년도 춘계(or 하계)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 워크샵때를 나는 기억한다. 배나사의 정관 작업이 거의 막바지이고 조만간 사단법인으로 전환한다고. 실제로 그 때 법쪽을 공부하시는 여러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정관을 거의 다 만들었었다. 아직까지 활동지침서와 함께 정관 수정본을 가지고 있는 나로썬 조만간 사단법인으로 전환된 배나사를 볼 수 있겠다는 일종의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사단법인은 만들어지지 않은 거 같고, 봉사단체로써만 남아 있다.

 

 

 대표교사라는 분은 정치에 뛰어들었다. 나는 그 사람과 정치 노선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하지만, 임태희 대통령 실장이 왔을 때 나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진보든 보수든 아이들은 그것과 상관 없으니까. 아이들이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어디든 어떠랴.

 

 

 그 대표교사가 새누리당 비대위원이 되고,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 대표 라는 이 타이틀이 정치적 목적으로 비춰질 때 나는 화가났다. 여러 선생님들이 해명을 요구하였다. 결론적으로 양쪽 다 만족할만한 성과를 못 이룬 듯 하다. 나는 군대에 있었고, 성명서에 참가했던 선생님들은 굉장히 안 좋은 추억이라며 그 얘기를 하기 꺼려했다. 8학기 이상, 다시 말해 2년 이상 배나사에 있었던 많은 선생님들이 그 때 많이 나갔다. 그 중에선 배나사 초창기부터 같이 이끌어 온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교사는 절차상 문제를 제기했었다. 그런데 배나사는 절차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었다. 사실 소규모 집단으로 서울과학고 선후배간의 단체에서 전국적인 단체로 커지면서도 우리는 자유롭게 의견을 말했다. 다시 말해 수평적인 존재였다. 거기서 절차를 운운했으니 당연히 초창기 멤버들은 좋게 보일리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배나사를 2009년 04월부터 시작했다. 비서울과학고 출신을 받기 시작한게 그해 2-3월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때 들어간 사람 중에서 길게 버틴 편에 속한다.

 

 내가 배정되었던 반은 모두 서울과학고 출신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서로 선후배였고 친한 관계였었고, 나는 따로 들어온 외톨이였다. 결국 나는 여름학기를 쉬었다.

 

 가을학기가 되자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다른 학교 출신들이 많이 섞이기 시작하면서 그런 분위기는 덜해졌었다. 여러 선생님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즐거웠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즐겁고, 아이들이 내가 가르친 걸 이해해서 스스로 문제를 풀 때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허나 이러한 기분을 더이상 배나사를 통해서는 느끼지 못할 것 같아 아쉽다. 복학하자마자 배나사를 다시 시작하려고 신청했지만, 너무 많은 학점을 신청하여 취소하였고, 겨울학기에 다시 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일 때문에 시작하지 못하였는데, 이젠 나중에 기회가 되더라도 배나사에서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너무나 많은 것을 준 곳이지만, 너무나 많은 실망을 준 곳이기에.